고려를 최전성기로 이끈 단 한번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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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당시의 동북아의 정세

 

 

성종 치세의 요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1004년 송나라에 쳐들어가서 현재의 하북성을 휩쓸었고

송나라는 “120만 대군을 동원해 요를 정벌하겠다”고 했으나….

순식간에 털리고 

매년 은 1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를 구걸하는

굴욕적인 “단연회맹”을 맺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고려

이미 두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바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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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치 혓바닥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

 

첫번째 침입은 서희의 말빨에 말려 고려 좋은 일만 해주고 왔고

 

두번째 침입은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쳐들어와

통주 전투에서 강조를 죽이고 개경을 함락시켰지만

양규, 김숙홍등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겨 곤란해진데다

마침 고려가 친조하겠다 약속하자 받아들이고 물러나던 와중에

흥화진, 압록강 등지에서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되죠

 

당시 기록에는 2차 침입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거란의 귀족출신 장교)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리도 태반이나 전사했다. 이에 유계(幽薊:하북지방) 지방에 영을 내려

일찍이 벼슬을 구하던 자와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하였다.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송나라의 기록

군사를 돌이킴에 항복하였던 여러 성(城)이 다시 고려로 돌아섰다. 
귀주(貴州) 남쪽 준령곡(峻嶺谷)에 이르자 큰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쳤다

갑옷과 무기는 대부분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비가 개인 후에야 강을 건너게 되었다

                                                                         

-요사본기(遼史本紀) 성종(成宗) 통화(統和) 29년 정월조 , 요나라의 기록

 

거란 군사는 여러 장수들에게 초격되었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지쳤으며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계묘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그들이 반쯤 건너갔을 때에 뒤에서 치니

거란 군사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고려사절요 현종 2년(1011년)

 

 

물론 친조약속은 지켜지지도 않았으며

인질로 요나라로 잡아온 대신 하공진은

성종이 배필까지 맺어주며 회유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탈출하려다 잡혀 처형당했습니다.

 

결국 2차례의 침입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피해만 입은 셈이 되었죠

 

결국 2차 침입으로 부터 8년후인 1018년

요나라 황제의 친위대인 우피실군(右皮室軍)을 주력으로 하는 10만의 병력을 소집하고

몽골 정벌,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2차 고요전쟁에도 참전하여 고려군을 격파한 적이 있는

선왕의 부마이자 동평군왕(東平郡王) 소배압 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경유수 야율팔가, 객성사 작고를 비롯하여 여러 장군들을 소집하여

고려 침공을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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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공격으로 망한후 서쪽으로 이주해 새로 건국한 서요(카라키타이) 병사와 장교의 모습

고려에 쳐들어온 요나라군 역시 거란, 몽골, 여진, 발해, 그외의 서역의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을 테니

귀주대첩 시기의 요나라군도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배압은 2차 침입 당시 고려에 이미 한번 왔던 적이 있었고

당시처럼 성 하나하나 함락시키고 가면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전략이 바로 “전격전”

 

고려군이 모일 시간을 주지 않고 중간의 성들과 도시들을 피해 

개경으로 무조건 직진해서

왕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사로잡아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요나라군 10만 모두가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또한 이 작전은 훗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써먹었던 작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달랐지만…)

 

하지만 고려측은 이미 왕래하던 상인들을 통해 요나라의 침공소식을 알고 있었고

미리 준비를 해두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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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갑옷 유물과 복원품

 

요나라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은 부원수 강민첨에게 12,000의 병력을 줘서 보냈고

강민첨은 압록강의 지류인 삼교천의 물을 막고 흥화진에 매복합니다 

 

 

 요나라군의 선두에 섰던 원심탄자군(遠探攔子軍)과

타초곡기(打草谷騎) 를 주축으로 하는 부대가 먼저 삼교천을 건너고

뒤이어 후속 주력 부대들이 뒤이어 강을 건너려 하자

강민첨은 상류에서 막아 놓았던 강물을 터뜨립니다.

 

급류가 몰아쳐와 후속 부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사이 

먼저 강을 건넌 원심탄자군과 타초곡기에게

매복하고 있던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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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水攻)은 흔히 알고 있는 강물로 적을 쓸어버리는게 아니라

실제로는 강을 건너는 적의 군대를 둘로 나눠서 각개격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강물만 가지고 적을 다 쓸어버리는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원심탄자군과 타초곡기는

뒤는 급류가 몰아치는 강물에 막히고 앞은 고려군에게 포위당했는데

애초에 정찰과 수색, 약탈, 보급을 담당하기 때문에

무장이 빈약하던 그들은 순식간에 궤멸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요나라군은 그들이 전멸당하는 동안 

강건너에서 발만 동동거리며 보고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흥화진 전투”에서 요나라군의 정찰과 보급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부대들이 전멸당했고

그리하여 전문적인 정찰병력이 부족해진 요나라군은

이후 고려군의 매복공격과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은 소배압의 진정한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죠

 

보통 중국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통로는 2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의주-흥화진-통주-곽주-안복부-숙주-서경-평주-개경으로 이어지는 남로(南路)

의주-흥화진-천마-귀주-태주-개주-순천-수안-평주-개경으로 이어지는 북로(北路)

였습니다

 

남로는 해안을 따라 난 통로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으며

북로는 내륙을 통한 길로 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통로였지요

 

일반적으로 고려에 쳐들어온 적들은 대부분 남로를 택했고

몇년전 있었던 2차 고요전쟁에서의 요나라군 역시 남로를 통해 남하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요나라군이 남로를 통해 올 것이라 예상한 고려군은

남로에 속한 영주(현재의 평안남도 안주)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습니다만

뜻밖에도 소배압이 택한 통로는 북로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라군은 북로를 통해 빠르게 남하하여

남로에 집결하고 있던 고려군 주력을 피해 고려군의 등뒤로 돌아와버렸죠

 

 생각지 못한 요나라군의 움직임에 허를 찔린 강감찬은 급히 명령을 내립니다.

 

“부원수 강민첨은 1만 4천의 기병을 줄테니 즉시 거란군을 추격하여 요격하라”

 

“병마판관 김종현은 1만의 철기(鐵騎)를 줄테니 전력을 다해 개경으로 달려 방어하라”

 

“동북면에서 오고 있는 지원군 3300명은 즉시 개경성으로 향하여 방어군에 합류하라”

 

 “그리고 나머지 병력은 남로와 북로의 교차점으로 남하하며 재집결한다”

 

고려군의 주력부대를 따돌리는데 성공한 소배압은 쾌재를 올리며 개경으로 달렸습니다.

 

이제 승부는 김종현과 동북방면 고려군이 개경에 먼저 당도하느냐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에 먼저 당도하느냐의 시간과의 싸움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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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588호 강민첨 초상화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최대 속도로 남하하여 요나라군을 후미를 따라잡는데 성공했고

개경으로 남하하는 요나라군의 엉덩이를 계속 찔러댓습니다

특히 자주 내구산 전투에서는 요나라군 부대 하나를 따라잡아 공격하여 궤멸시키기도 했지요

하지만 요나라군은 계속해서 엉덩이를 찔리면서도 앞만 보면서 달렸습니다.

 

피해가 좀 나더라도 고려왕을 잡으면 충분히 만회가 된다는 일념이었지요

 요나라군에게 다른 성들은 안중에 없으며 목표는 개경성뿐이라는걸 알게된 고려군은

자신들이 지키던 성에서 뛰쳐나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대동강을 건너려는 요나라군을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서경 동쪽의 마탄(馬灘)에서 습격하여

1만이나 되는 요나라군을 격멸하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죠

 

참고로 마탄(馬灘, 말여울) 이라는 지명이 생긴 이유가 바로 이 전투였습니다

수많은 죽은 말들이 떠내려와 산처럼 쌓여서 마탄 이라고 불리우게 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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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군은 남로의 최단경로를 전속으로 달려 결국 요나라군을 따라잡는데 성공한다 

 

 

1019년 1월 3일

 

요나라군은 드디어 개경에서 40km거리의 신은현(현재의 신계)에 도달합니다

이 소식은 즉시 개경에 알려졌고

고려왕 현종은 성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대피시킨후

성밖의 식량과 건초등을 치워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개경을 사수하겠다는 의지였지요

 

얼마 지나지않아 요나라군의 선발대 300여명이 개경의 통덕문에 도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요나라로 되돌아 간다고 알려주고 사라지는데

이건 고려측의 반응을 떠보기 위함이었고

이에 현종은 결사대 100여명을 보내어 금교역에서 이들을 습격하여 전멸시킵니다.

아직 고려측의 지원군이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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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개경은 인구 50만의 대도시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김종현의 부대가 개경에 도달했고

고려의 지원군이 개경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소배압은 개경을 함락시키는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퇴각을 결심합니다

 

요나라군이 퇴각하자 김종현은 자신이 지휘하는 철기 1만을 이끌고 그들의 뒤를 밟기 시작합니다

강민첨에 이어 김종현의 군대까지 요나라군의 뒤에 따라붙기 시작하자

요나라군은 그들을 따돌리려 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해서 각자 다른 루트를 통해 추격하던

김종현과 강민첨과의 거리를 조금은 벌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 본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로에서 북로로 진입한 고려군 본대는 순안과 개천에서 요나라군의 소규모 부대를 만나 격파했고

요나라군 본대가 자신들의 주변 어딘가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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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군이 강민첨과 김종현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영변, 박천, 대천, 귀주방면으로 기동하는 사이

고려군 본대는 즉시 귀주로 향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건 요나라로 가기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19년 2월1일(양력 3월 1일)

 

자신들이 온 북로를 따라 태주에서 귀주방면으로 퇴각하던 요나라군 10만 앞에

거의 20만에 달하는 고려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만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귀주였기에

결전을 피할수 없다는 판단하에 요나라군은 전투 준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장수들의 의견은 갈리게 되는데

대부분의 장수들의 의견은 신중을 기하자였습니다

 

그냥 다하(茶河)와 타하(蛇河)를 고려군과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있다가

고려군이 강을 건너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가장 유리합니다.

 

하지만 동경유수 야율팔가의 의견은 달랐죠

 

적이 강을 건너온 후에 싸우면 적은 배수진을 친 형세가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니 그건 도리어 위험한 계책입니다

지금 위치에서 물러나 다하와 타하 사이로 적을 유인한 후 공격하는게 현명하다 생각합니다

 

이 의견을 들은 소배압은 야율팔가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현재의 보급상황으로는 최대한 빠른 결전이 필요하다

또한 이번 원정에 황제폐하의 오른팔인 우피실군까지 데리고 왔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간다면 책임추궁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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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군의 대략적인 초기 배치도

파란색은 고려군, 붉은색은 요나라군

 

양군은 강을 끼고 전투를 개시합니다

요나라군은 재빨리 고지대를 선점하고 

강물 때문에 숫적인 이점을 살리기 힘든 진영배치를 하게된 고려군을 압박하려 하였으나

고려군은 착실하게 검차를 앞세워 요나라군의 맹공을 막아냈으며

양군은 서로의 공격을 방어하고 역습하며

며칠에 걸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려군은 장기의 차, 포와 같은 주력부대인 김종현과 강민첨의 기병대가 없는 상황

요나라군은 보급이 쪼달려 최대한 빨리 결착을 내야하는 상황

둘다 초조하긴 마찮가지였죠

 

그렇게 며칠간을 계속하여 싸우던 도중

갑작스럽게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는데

그런 비를 맞으면서도 양군은 피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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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판관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기병대가 요나라군의 좌익을 강타

 

요나라군의 왼쪽에 정주방면에서 요나라군을 추격해온 김종현의 기병대 1만이 나타납니다

김종현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고려와 요나라군의 전투를 보고

즉시 요나라군의 옆구리를 찌르기 위해

자신이 지휘하는 1만의 기병대에게 돌격을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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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주대첩을 그린 민족 기록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격돌하는 고려와 요나라 기병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때 지금까지 고려군쪽으로 빗방울을 날리며 불리하게 작용하던 바람의 방향이

극적으로 요나라군 쪽으로 바뀌며 요나라군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김종현의 철기 1만은 바람을 등지고 달려 요나라군의 옆구리를 강타

 

요나라군의 좌익은 갑작스런 김종현군의 습격에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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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나타난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1만 4천의 기병대가 요나라군의 후방을 강타

 

아직 요나라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태주방면에서 요나라군을 추격해온

부원수 강민첨의 기병대 1만 4천이 요나라군 후방의 언덕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강민첨 역시 즉시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고

언덕위에서 쏟아져 내려온 1만 4천의 고려 기병대에 요나라군은 다시 한번 강타 당했으며 

요나라군은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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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의 제왕중 펠렌노르 평원전투에 나오는 로한 기병대의 숫자가 겨우(?) 6천

하지만 귀주대첩 당시에는 1만 + 1만 4천의 고려군 기병대가 차례로 요나라군 진영에 돌격을 감행하는 

영화를 능가하는 ㅎㄷㄷ한 스케일을 보여줬다..

 

 

고려군 기병대의 돌격을 직격으로 맞은 요나라군 부대들은 그대로 궤멸당해 버렸는데

 

요나라 황제의 친위대이자 최정예부대이던 우피실군(右皮室軍)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천운군(天雲軍) 격멸, 천운상온(군지휘관) 해리(海里) 전사

요련군(遙輦軍) 격멸, 요련장상온 아과달(阿果達) 전사

발해군(渤海軍) 격멸,  발해상온 고청명(高淸明) 전사

이외에도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역시 전사합니다

 

특히 거란어로 피실은 “금강(金剛)”

즉 피실군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단단함을 자랑하는 요나라 황제의 최정예 친위대였는데

귀주에서 소멸됩니다

우피실군은 2차 고요전쟁 당시 통주전투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강조를 잡아죽인 부대였는데

귀주대첩에서 전멸함으로서 통주전투의 복수를 톡톡히 한 셈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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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섬멸 당하는 와중에도

요나라군은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기 위해 싸웠고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인 해족(奚族)으로 이루어진 효리군(肴里軍), 열가군(湼哥軍) 양군과

피실군, 발해군의 잔존 병사들은 살아남은 지휘관들의 지휘하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본대와

강민첨이 이끄는 기병대의 포위망 경계부분에 틈을 발견하고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 포위망을 뚫고 1만 이상의 생존 병력이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뒤를 강민첨이 이끄는 기병대가 다시 따라 붙었으며

10km에 걸친 추격전 끝에 따라잡힌 요나라 패잔병들은

반령 고개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다 궤멸됩니다

 

귀주에서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요나라군은 10명중 한명도 안되는 대승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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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본기 16권 성종 개태 7년(1018년) 정유

 

개태 7년 12월 정유,

소배압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사이에서 고려와 전투를 벌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아

천운,우피실 2군에서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은이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 아과달, 객성사 작고, 발해상온 고청명, 천운군상온 해리 등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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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사가 승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했다.

용기가 스스로 배가되었다.

거란의 병사들은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렀는데,

적군의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고 포로로 잡은 인원과 뺏은 말과 낙타, 갑옷, 투구, 병장기 등이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적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여 명이었다.

거란이 지금까지 이토록 무참한 패배를 당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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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에 걸친 요나라(거란)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이 전투가 끝나고

고려군이 포로들을 데리고 개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나가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일곱 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과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라는 으마으마한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강감찬조차 감당할수가 없다며 사의를 표명할 정도였죠

 

이에 비해 무기고 갑옷이고 부하들이고 다 버리고 겨우 도망치는데 성공한 소배압을 만난 요나라 성종은

“니놈의 얼굴가죽을 벗겨 죽여버리겠다” 며 펄펄 뛰었지만

선왕의 부마(국구)인 그를 죽일수는 없었고 폐서인 시켜 내쫒아 버렸습니다

훗날 유왕(幽王)의 직위에 복귀하긴 하지만 더이상 활약은 못한체 그냥 조용히 지내야만 했지요

 

 

 

 

그렇게 동북아시아는 송, 고려, 요의 삼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시대가 옵니다

송은 요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고려와 연합으로 양면전선을 구축해야만 했고

요는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방의 고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이중 가장 득만 있고 실이 없던 곳이 바로 고려였습니다..

요나 송은 고려의 협력이 간절히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전투의 승리로 상승한 “국격”이 어느 정도였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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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사신이 [고려高麗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 송사 외국전 고려

 

   송나라 사신이 오면 별별 핑계로 와서 삥뜯어갔다는 기록…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오면 뇌물준다고 허리가 휘었던 걸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기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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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송(宋)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다

 

-소식(동파) 묘지(墓誌)

 

 

고려사신은 송나라 지방관들을 능멸하고…

고려사신을 안내하는 중국관리까지 고려사신빽으로 행패를 부립니다

하지만 혐한의 원조인 소동파도 차마 고려사신한테 직접 뭐라고는 못하고

중국관리들만 조집니다

고려사신은 공시걱인 문서에 송나라 연호도 안쓰고…

그냥 갑자로 쓰는 대찬 모습을 보이는데(병신년, 갑자월 일 이런식으로..)

결국 참다참다 빡친 소동파가 지랄하니까 마지못해 송나라 연호를 써주죠

 

참고로 소동파는 조국인 송나라를 삥뜯는 고려에 격분해서

고려금수론, 고려해악론 등을 집필하며

고려인은 짐승과 같고

고려는 송나라에 좀같은 존재이니 어서 단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조 혐한의 진면목을 보였지만 도리어 비웃음만 당하고

 

고려왕자출신의 승려 “의천”이 송나라로 유학왔을때

그의 관광가이드를 맡아 명승지나 안내하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고구려를 흔히 한민족 최고의 전성기로 꼽기도 하지만

진정한 전성기는 이때죠…

1세기 가까이 동북아시아의 양대대국이던 송과 요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두 대국을 흔들던 시기였으니 말이죠

 

 

 

 

출처 – 락싸 ‘꼬마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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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 전투 王儉城戰鬪

B.C 108

 

“원봉 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옛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最)씨를 시켜 그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사를 죽이게 했다.”

 

한국사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춘추전국의 열국 연(燕)과 경쟁하였고, 위만 집권 이후엔 주변의 군소 국가들을 정복하며 우거왕 대에 이르러서는 한반도 남부의 진과 한 제국 사이의 중계무역을 주관할 정도로 그 위세가 성장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한 무제는 고조선의 이러한 성장을 경계하였다. 결국 한의 사신 섭하가 고조선의 호송관을 죽이며 이 갈등이 표면화 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거왕이 섭하를 살해하자 양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서 고조선은 내분을 앓은 끝에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우거왕과 성기 장군이 살해당했으며, 결국 기원전 108년, 왕검성의 함락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옛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한반도의 역사도 새로운 고대국가들이 등장하며 전환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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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전투 平壤城戰鬪 

A.D 371

 

“371년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한반도 일대의 옛 고대 국가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세력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었으며, 이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한강을 중심으로 말갈, 낙랑, 대방,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과 경쟁-교류를 병행해 성장하던 백제였다.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 백제는 사방으로 대대적인 확장책을 실시하였으며, 북방의 고구려와도 그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371년 결국 백제와 고구려가 평양성에서 충돌한 끝에 고국원왕이 전사하였으며, 그순간 한반도 역사의 패권국이 결정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수십년간 국왕이 살해당한 치욕을 감내하며 권토중래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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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합전 四方合戰 

A.D 407

 

“1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기보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 5만이 모종의 세력과 벌인 회전 끝에 거둔 대승.

역사학계에서는 406년 12월까지 고구려가 후연과 싸우고 있었다는 점과 407년에 후연이 멸망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모종의 세력을 대부분 ‘후연’ 으로 추정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407년에 벌어진 이 전투가 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언급된 모종의 세력이 백제였다는 설도 있었지만, 그 정체는 차차하더라도 광개토대왕이 치룬 이 한번의 회전을 통하여 고구려는 동북아의 유력강국으로 급부상하였음이 확실하다.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사후에도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이르기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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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管山城戰

A.D 554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삼국 시대 후기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

고구려의 성장으로 맺어진 나제동맹은 고구려에 맞서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가 하류까지 내려와 백제 측이 점령했던 한강 유역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면서 그 끝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태자 창을 앞세워 관산성을 공격하여 초기의 승세를 점하지만, 신라의 김무력이 북쪽 한강 유역의 점령군을 이끌고 원군으로 내려오자 전세가 백제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성왕은 태자가 분전하는 상황에서 전세를 만회하고자 밤을 틈타 신라군을 기습하려던 중 거꾸로 신라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고간도도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점유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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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薩水大捷

A.D 612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이제 만족함을 알았으면 돌아감이 어떠한가.”

 

612년, 수 양제는 전투병만 113만 3천 8백에 이르는 유례없던 규모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수나라의 대병력은 고구려의 끈질긴 대응과 지휘관들의 부실한 지휘능력으로 요동에 발이 묶인 채 전세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수 양제는 이러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30만 5천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들의 군수품과 병력을 지원해야할 내호아의 수군은 고건무의 활약으로 궤멸되었기에 30만여 대군은 그저 무용지물이었다. 이윽고 수나라의 별동대는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을지문덕은 이들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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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安市城戰鬪

A.D 645

 

“당나라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최고의 수성전으로 손꼽히는 전투.

이 시기 당 태종에게 있어서 고구려는 수십년 전 수나라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으며, 동북아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당과 경쟁하는 국가였기에 좌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곧이어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킨 당은 파죽지세로 비사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을 함락시켜 요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에 고구려는 요동 전선의 지원병력으로 고혜진과 고연수의 15만 대군을 급파하였으나 이들은 주필산에서 궤멸되었으며, 곧바로 당군은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하며 안시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시성의 군민들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성주의 지휘 아래 일치단결하여 당 태종이 지휘하는 당나라 본군의 파상공세를 수십일 간 기적적으로 막아내었다. 이후 당 태종이 쌓아놓은 토산이 무너지자 고구려는 승리의 냄새를 직감했고, 안시성 이외 함락되지 않은 신성과 건안성을 중심으로 당을 향해 반격을 가하였다. 때마침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의 장기전으로 보급난을 겪고 있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요동에서 군사를 철군시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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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黃山野戰鬪

A.D 660

 

“백제군 한 명이 천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라군이 끝내 퇴각하였다. 이렇게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힘이 다해 전사하였다.”

 

백제의 멸망을 결정지은 최후의 전투.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한 이래 신라를 수차례 압박하며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왕권과 신권의 반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외부에서는 나당동맹이 결성되며, 그 첫번째 연합작전으로 백제 공격을 실현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조정에서는 성충과 흥수가 제안했던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전략’ 과 ‘당군의 상륙을 일단 허용한 뒤 좁은 길목에서 당과 신라군에게 공세를 가하는’ 두 가지의 전략 방안이 맞섰고, 결국 후순위의 방안을 택하게 되며 황산벌로 계백을 파견했다. 계백은 5천 결사대를 구성하여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분투했으나, 결국 신라의 매서운 공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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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전투 白江戰鬪

A.D 663

 

“유인궤가 백강 입구에서 부여풍, 왜인과 4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웠다.”

 

아마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실현된 대규모의 국제 수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과 도침은 부여풍을 왕으로 내세우며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다툼 끝에 복신과 도침이 사망하고, 나당 연합군의 반격이 점차 거세지자 부여풍은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의 원군이 도착하여 백제 부흥군과 일본의 연합세력은 함선만 천여 척이 넘고 병력만 5만이 넘는 대군세를 자랑했으나 한발 앞서 백강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던 나당 연합군의 화공에 백제-일본의 연합군은 전선 400척을 잃으며 궤멸되고 말았다. 백제 부흥 운동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를 사이에 둔 양면 전선을 강요받게 되었으며, 일본 역시 백제 중심의 외교관계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이 전투는 이후의 동아시아 세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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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함락 平壤城陷落

A.D 668

 

“총장(總章) 원년 9월에 적(勣)이 또 평양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니, 남건(男建)이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대패하였다. 남건의 밑에서 병사를 총관(總管)하던 승(僧) 신성(信誠)이 비밀리 군중(軍中)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문(城門)을 열고 내응(內應)하겠다고 하였다. 5일이 지나서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었다. 적(勣)이 군사를 놓아 들여보내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성(城)의 문루에 불을 지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에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키고 고장(高藏),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았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그의 아들들이 중심이 된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멸망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결국 연남생이 당군을 끌어들이며 제 3차 고당 전쟁이 발생하게 되고, 신라 또한 이에 호응하며 고구려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를 직면하였다. 이제 고구려의 최후 방어선으로 평양성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고구려군은 연남건이 중심이 되어 나당 연합군에 맞서 처절한 사투를 지속하던 와중, 평양성의 내부에서 신성이라는 승려가 당과 내통하여 성문이 열리게 되었다. 평양성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연남건은 자결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결국 보장왕과 함께 당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요동의 주인이자, 유수한 중국의 제국들과 당당히 맞서던 고구려가 70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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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 전투 買肖城戰鬪

A.D 675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 3백 8십 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

 

평양성의 함락으로 신라와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은 한반도 전역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으며, 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신라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압박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당의 행보에 신라가 반발하고 이는 곧 나당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쟁 초기부터 신라는 석문전투와 고구려 부흥군의 패망 등 불리하게 진행됐던 전황을 타개하고자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당나라는 유인궤가 지휘하는 20만 대군을 대대적으로 편성해 동시다발적으로 임진강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후 칠중성에서 신라군이 패퇴하는 등 전황이 점점 더 불리해지려던 찰나, 매소성에서 기적같은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근행이 이끌었던 당의 주력군이 매소성을 수성하던 신라군에게 일대의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 승리를 기점 삼아 나당전쟁의 판세는 신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서히 그 변화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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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전투 伎伐浦戰鬪

A.D 676

 

“겨울 11월,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다시 진군하여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벌어진 나당전쟁 최후의 전투.

나당전쟁의 승리 요인으로는 당나라가 대륙 반대편 서역에서 토번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양면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 판단한 것도 있겠으나 당시 당에 맞서 싸우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끈질긴 저항의식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투 초기에 신라 수군은 당의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패배하였으나, 이후 당의 전함들과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전황을 장기전으로 변화시켰다. 이 동안 신라 수군은 더욱 더 증원되기 시작했고, 분산돼 있던 신라 전함들이 속속 집결하며 당군과 22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날로 지쳐가던 당 함대는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상당수의 당 전함이 침몰되고 4천 명의 당군이 전사했다. 이 기벌포 해전의 승리로 나당전쟁에서 신라는 최종 승리를 거뒀으며,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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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 전투 天門嶺戰鬪

A.D 697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는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황제가 보낸 군대는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발해 건국의 계기가 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연합 세력이 주나라와 벌인 일대의 격전.

696년, 거란족의 이진충이 영주에서 주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틈타 대중상의 고구려 유민 세력은 걸사비우의 말갈족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의 옛 고구려 땅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 나갔다. 이에 주의 황제 무측천은 거란의 반란을 진압한 뒤, 이들과의 정면충돌에서 일어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는 회유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측천의 봉작을 거절하며 독자행보의 의지를 명확히 하였고 무측천은 이들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 거란족에서 항복한 이해고를 총대장으로 삼아 공세를 가했다. 걸사비우가 전사하고 대중상이 병사하는 등 주요 지도부가 붕괴된 어려운 상황에서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후퇴를 반복하며 이해고와의 전투를 지속했다. 그렇게 그들은 천문령에서 일대 격전을 벌였고 승리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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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 습격 登州襲擊

A.D 732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자, 좌령군 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였다.”

 

무왕이 즉위한 이래 발해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벌였다. 이는 당의 입장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기에 때마침 흑수말갈이 입조한 것을 계기로 당은 흑수말갈 지역에 관청을 설치하여 동서 양면에서 발해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발해는 이러한 당의 조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무왕은 대문예로 하여금 당과 연합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으나 대문예는 오히려 당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어진 대문예의 처분 문제로 당과 발해 사이의 갈등은 더 심화되었으며, 이는 곧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발화되고 말았다. 그 전초전은 장문휴의 등주 습격이었으며, 당시 발해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신당서』의 「오승자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에서는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가 발생하였으며, 등주라는 항구도시는 완전히 파탄났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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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전투 公山戰鬪

A.D 927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점차 국가의 체계를 갖추면서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하고, 이어서 왕건이 궁예를 축출해내며 한반도는 후백제-고려-신라의 형세를 구축하게 되었다. 특히 왕건과 견훤은 삼한일통의 경쟁자로서 충돌이 불가피했고 신라와의 대 외교 관계에서도 그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는데 결국 먼저 견훤이 직접 후백제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시해하고 금성을 유린하자, 왕건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원군으로 참여하였다. 이 둘의 주력군은 공산에서 맞붙게 되었고, 결과는 후백제군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의 피해로 고려는 신숭겸, 김락과 같은 주요 지휘관들을 잃었으며, 왕건 본인도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탈출하는 굴욕을 맛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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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전투 古昌戰鬪

A.D 930

 

“구차히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워야만 승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과 마주하고 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기세가 꺾여 달아날 걱정만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뒤쫓아 가 구원하지 않고, 고창군의 3천명 넘는 군사들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길 바라옵니다.”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대승을 거두자, 후백제는 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며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드디어 견훤은 상주에서 고려의 경상도 마지막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고창을 점령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백제군이 워낙 기세등등했기에 왕건은 고창을 포기할 것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유금필의 진언에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진군하였다. 고려와 후백제의 양측 군사가 각각 병산과 석산에 진영을 배치한 채, 치열한 전투가 3~4일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견훤에게 반감을 가진 고창 일대 신라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그 틈을 타서 유금필이 저수봉에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자 견훤은 대패했다. 후백제군의 전사자만도 8천여 명에 달했고 견훤도 겨우 목숨만 건져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 전투의 복수 뿐만이 아닌 후삼국 시대의 향방을 결정지었다는 것에서도 이 전투는 그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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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 一利川戰鬪

A.D 936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병력을 합쳐 일선(一善)에 진군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후삼국 시대를 종결지은 최후의 전투.

고창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에게 돌아갔으며, 이후 고려는 전방향에서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후백제의 판도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934년, 멸망한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한 데 이어 오랜 전란을 더이상 버티지 못한 천년 왕조 신라도 마침내 935년, 고려에게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의 2/3를 아우르는 영토들을 모두 평정하였고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한 나라뿐인 상황이 되었다. 그러한 와중, 왕건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또 찾아왔다. 후백제의 후계자 다툼 끝에 맏아들 신검이 이복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한 것이다. 견훤은 기회를 틈타 탈출해서 고려로 귀부하였으며, 왕건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이 희대의 라이벌을 상부(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벌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며 왕건에 대한 적극 협조를 약속하고, 마침내 고려와 후백제의 양군은 일리천에서 총력전을 각오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자가 후삼국의 난세를 통일하고 새로운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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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龜州大捷

A.D 1019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가파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으나 그 성장과정은 탄탄대로만 걸을 수는 없었다. 외교 관계에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로도 팽창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고려는 북진정책과 송과의 화친으로 인해 거란에 대한 적대노선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양국간의 이해관계는 국가의 명운을 건 대규모의 전면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렇게 발화된 여요 전쟁은 2차례에 걸쳐 지속되었다. 마침내 소배압을 총대장으로 하여 10만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하며 제 3차 여요 전쟁이 발생하자, 상원수 강감찬이 이끄는 약 20여 만의 고려군은 수공, 유격전, 청야전술, 포위 섬멸전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거란의 대군을 격멸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고려는 국가의 위상을 굳건하게 함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후 120여 년간의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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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 전투 龜州城戰鬪

A.D 1231-1232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

 

몽골에서 일어난 기마민족의 폭풍은 유라시아를 집어삼켰고, 고려 역시 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몽골은 살리타이를 총대장으로 하여 고려를 침공했으며, 곧이어 압록강을 넘어 의주, 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남하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고려의 군세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당시 귀주성을 지키던 박서와 김경손만은 몽골군에 맞서 끈질긴 저항을 이어나갔다. 특히 당시의 김경손은 낙석에 깔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도 두려운 기색없이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이는 고려 관민의 정신적 결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231년 9월부터 1232년 1월까지 장장 4개월 간의 기나긴 공방전을 치루며 고려군은 귀주성을 수성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불리한 전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마침내 고려 조정이 몽골과의 강화를 택하며 항복을 명했기에 박서와 김경손은 결국 왕명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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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 處仁城戰鬪

A.D 1232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1232년 8월 몽골의 대대적인 2차 침략이 시작되고, 서경을 함락한 이래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살리타이는 전란 당시의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작은 토성(土城)인 처인성(處仁城)을 마주하기에 이른다. 이에 처인성의 수호장을 맡게된 승려 김윤후는 군민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고 전투를 앞둔 채 동요하는 그들의 심리상태를 진정시켰으며, 적들의 주요 공략지로 판단한 처인성 동문 밖에 저격수 수십 명을 배치시켜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고 기적이 일어났다. 김윤후가 쏜 단 한 발의 화살이 몽골군의 총대장 살리타이를 즉사시킨 것이다. 총사령관이었던 살리타이의 사망은 몽골군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몽골군은 결국 고려의 왕이 나올 때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려와의 강화를 체결하며 철군하게 되었다. 이후 김윤후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작을 하사받았으며, 21년 후의 충주 부곡 전투에서도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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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三別抄─亂

A.D 1270-1273

 

“왕이 다시 김방경을 시켜 토벌하게 했는데, 김방경이 힌두 등과 함께 공격해 들어가자 적은 마침내 궤멸되었다. 김통정이 잔당 70여 명을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쳤다가 목을 매 자결하니 탐라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배중손이 군사를 일으킨 이래 강화도, 진도, 제주도를 돌며 수년간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에 대항한 삼별초의 반란은 김통정의 자결로 그 끝을 맞이하였고, 이후로 고려는 몽골 제국의 부마국으로서 내정간섭을 감수하여야만 했다. 몽골제국은 그 외에도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273년부터 1290년까지 제주도를 직할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다. 그리고 오키나와에 남아있는 12-13세기의 유물, 유적들이 대부분 고려의 양식과 그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을 근거로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이동하여 류큐왕조의 역사에 기여한 것으로 보는 오키나와 이동설이 조금씩 조명되고 있는데, 위와 같은 사례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삼별초의 난을 두고 발생한 수많은 역사적 입장과 논쟁들을 차차하더라도 이 시기 벌어졌던 삼별초의 난은 당시 고려의 정치적, 국제적 지형에 큰 변화를 이끌었음이 확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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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수복전 開京收復戰

A.D 1362

 

“저희끼리 밀고 밀치다 죽은 적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10만이 넘는 적들의 머리를 베었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와 금은보화, 금·은·동으로 만든 인장, 무기 등의 물품을 노획했다. 그 잔당인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도망쳐 버리니 적도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추진하며 고려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하였으나, 대륙에서부터 시작된 홍건적의  불길은 고려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고려는 그렇게 발화된 홍건적의 첫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은 또다시 20만의 군세를 이끌고 2차로 고려를 침공했으며, 결국 공민왕이 개경을 빼앗기고 안동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안우와 이방실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무장들은 병력을 재편하여 반격을 준비했으며, 홍건적과의 치열한 공성전에 돌입한 끝에 마침내 개경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 무인들이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들은 훗날 고려 역사의 방향을 결정지을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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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전투 鴻山戰鬪

A.D 1376

 

“신이 비록 늙었으나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뜻은 결코 쇠하지 않았으니, 빨리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놈들을 격퇴하게 허락하여 주소서.

 

이 시기 고려를 위협했던 것은 비단 홍건적 뿐만이 아니었다. 서북면에서는 북원과 나하추의 잔당이, 동북면에서는 여진족이, 남방에서는 왜구가 사방으로 고려를 향해 위협을 가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376년에 쳐들어온 왜군은 나주, 부여, 공주, 논산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약탈하며 세력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이에 최영은 당시 60세를 넘긴 노구였으나, 우왕을 설득하여 홍산 일대에 잡결한 왜군을 맞아 직접 전장에 선봉으로 나섰다. 입에 화살까지 맞을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를 치룬 끝에 최영은 큰 승리를 일궈내었고, 이후 ‘백수 최만호’ 로 불리우며 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전투가 벌어졌던 홍산 일대는 그 전장의 규모가 작았던 데다가, 당시의 국면에 있어서 영향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기에 홍산 전투 자체를 두고 ‘대첩(大捷)’ 이라 부르기엔 많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때 당시 최영이 거둔 승리는 고려 말기의 혼란을 종식시킬 그 발판이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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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전투 荒山戰鬪

A.D 1380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홍산에서 최영이 대승을 거뒀다고는 하나, 왜구의 침공은 기름칠한 짚단을 태우는 불길처럼 그 열기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최무선이 진포에서 500여 척의 규모를 자랑하는 왜구의 대선단을 맞아 이들의 함선을 대부분 분멸하는 큰 승리를 거뒀지만, 이때 함선을 잃은 왜구들은 내륙으로 흘러들어간 기존의 왜구들과 결합하여 더 방대해진 규모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결국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의 삼도 순찰사로 임명하여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었던 왜군의 주력부대와 맞서게 하였고, 마침내 이성계는 황산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이성계는 고려를 구한 구국 제일의 영웅으로 조명받게 되었으며, 이는 차후 이성계를 따라 고려의 개혁 혹은 신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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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전투 開京戰鬪

A.D 1388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고 남옥의 막북원정으로 북원 세력이 궤멸하자 두려울 것이 없어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한 외교적 강경책의 일환으로 철령위의 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일을 두고 고려의 두 명장 최영과 이성계 사이에서 논쟁이 일었다. 당시의 최영은 요동 공격론을 내세웠으나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논거하며 요동공격의 불가능성을 역설한 것이다. 결국 최영의 의견대로 고려는 5만의 공요군을 구성하였으며, 이성계는 압록강 너머의 위화도까지 북상하여 공요군을 정착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장마철에 불어난 물은 더 이상의 행군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지속적인 익사자와 아사자의 발생으로 사기마저 바닥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요군은 즉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하였고,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최영은 분투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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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강 전투 婆猪江戰鬪

A.D 1433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 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

 

조선 세종의 대북방 정책인 4군과 6진 개척의 전초전.

개국 이래 조선은 태종과 세종대에 이르러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허나 개국 이전부터 이어져 온 북방 여진족의 위협은 더더욱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져만 갔고, 당시 세종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는 좌시할 수가 없었다. 이후 세종은 화약무기와 그 체계를 발전시키고, 진법 훈련을 확대하는 등 철저히 여진 정벌을 계획하였다. 마침내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며 여진 정벌전을 실현시켰고, 최윤덕은 파저강 일대에서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조선측의 피해로는 사상자만 9명을 내었던 데 반해 여진족은 170명의 사망자를 내고, 236명이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천여 점 이상의 무기손실을 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가축과 군마가 조선군에게 노획당하고 수많은 부락이 없어지는 등 여진은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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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해전 玉浦海戰

A.D 1592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겁게 움직여라.

 

이순신의 첫 해전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

200년 간 대규모의 외침없이 긴 평화를 누려옴과 함께 군역의 체계가 무너져 가던 조선은 4월 13일, 부산포로 순식간에 닥쳐온 일본 정규군의 침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며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결국 탄금대에서 신립의 패배로 조정은 몽진을 결정하기에 이르고, 개전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빼앗긴 이후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를 겪으며 조선은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듯  보였다. 그때, 바다에서 국면의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조선 수군이 첫 승전보를 전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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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해전 閑山海戰

A.D 1592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장쾌한 대승.

옥포의 승전 이후에도 이순신이 잇다른 해전에서 연승연승하며 그 기세를 이어나가자 일본군은 단순한 병력의 피해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보급에도 난항을 겪으며 전세의 불리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용인 전투의 승리로 이름을 알린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대규모 병력을 증원해 주며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와의 연합을 통해 조선 수군과 결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공로에 눈이 멀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단독으로 출정하였고, 곧이어 이순신은 견내량에 정박해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함대를 한산도 근해로 유인해 내었다. 마침내 이순신이 구상한 학익진에 걸려든 일본 전선들이 대부분 분멸되었다. 연이어 안골포에서도 큰 타격을 입게 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해전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으며 장기농성을 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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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진주성 전투 第一次晋州城戰鬪

A.D 1592

 

“대개 온 나라가 무너진 나머지 한 사람도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만은 홀로 외로운 성을 능히 굳게 지키면서 바깥 원조도 받지 않고 큰 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리하여 한 도를 온전하게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남으로 가는 길을 막아 적으로 하여금 내지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목사의 공이 이에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의 치열한 혈투끝에 전라도 방어선을 지켜낸 대승.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의 활약과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함으로 인해 수륙 병진 작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고, 조선의 육군도 본격적인 방어태세를 구축하기 시작하자 기세가 꺾인 일본군은 전세의 반전을 꾀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 진입을 노려 진주성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이어 진주성을 응원하러 온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최후로 시작된 전투는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의 일본군이 파상공세를 가해오며 치열한 공성전의 양상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주성의 관민들은 성주 김시민의 지휘아래 끈질긴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6일 간의 공성전 동안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성 밖에서도 곽재우, 김천일, 김준민 등 조선의 의병장들도 끊임없이 유격전을 감행하며 일본군에게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으므로 우키다 히데이에는 결국 전멸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진주성에서 퇴각을 결정하여야만 했다. 고된 혈투끝에 이룬 조선군의 장쾌한 대승이었으나 진주성의 성주 김시민은 이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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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전투 幸州山城戰鬪

A.D 1593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이겠는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 수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대승.

평양성의 탈환 이후 권율은 행주산성에 주둔한 채 남하하는 조명연합군에 호응하며 일본군이 주둔 중이던 한양을 수복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벽제관에서 명나라가 패하며 전황은 급격히 반전되었고, 일본군은 한양의 지근거리에서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고 조선군은 천자총통,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수많은 화기를 이용하며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시간이 흘러 결국 화살이 떨어져 수세속에서 조선군의 패색이 짙어졌던 그때, 기적처럼 구원군이 도착했다. 정걸 혹은 이빈으로 추측되는 경기 수사가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으로 거슬러 온 것이다. 게다가 같이 온 수십 척의 전라도 조운선도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이 인솔하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일본군은 당황하며 최종적으로 퇴각을 결정하였고, 조선군은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3천의 조선군에 비해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할 정도로 승리에 집착한 일본군이었으나, 결국 참패를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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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진주성 전투 第二次晋州城戰鬪

A.D 1593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임진왜란의 전투들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으며, 가장 참혹했던 전투.

마침내 행주산성의 대승 이후 한양까지 조명연합군이 탈환하며 전세를 반전시키자, 일본군은 총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명과의 협상에 돌입하며 불리한 전황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김시민에게 당했던 진주성에서의 복수전을 계획하였다. 곧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주요 다이묘들과 본토에서 추가된 일본군의 전 병력이 진주성으로 향했다. 곽재우와 같은 수많은 의병장들이 구원을 거부하며 진주성의 방어를 포기하라는 권고를 할 정도로 양측간의 전력차는 엄청났다. 그러나 황진, 최경회 이하 대부분의 조선 지휘부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일본군의 대공세에 맞서기로 하였으며, 곧이어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조선군은 7일간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너무나도 열세였던 전력차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기록에서는 이때 당시의 전투 이후 5만 명의 백성들이 학살당하였다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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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 鳴梁海戰

A.D 1597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며 전세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해전사의 기적.

심유경과 고니시의 사기극으로 강화는 결렬되었고, 이후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조선을 재침공한다. 개전 초기부터 조선은 정보의 혼선과 이로 인한 군왕 선조와 신료들의 오판으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으나 원균은 졸렬한 지휘로 칠천량에서 대패하였으며, 조선 수군도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일본군에게 호남의 진입을 허용하고, 수륙 양면에서 수도 한양과 내륙의 조명 연합군이 동시에 전면적으로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복직하자마자 곧장 궤멸된 수군을 수습해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선조조차 수전을 포기하라 권고할 정도로 전력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던 가운데 1597년 9월16일(음력),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 단 13척으로 백 삼십여 척 이상의 대규모 일본 수군 선단과 맞섰다. 그리고 이 날의 장쾌한 대승은 역사에 남게 되었고,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여 전황의 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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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 露梁海戰

A.D 1598

 

“전투가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과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이어진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

명량 해전 이후 직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이 남하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에만 전전하고 있었던 도중, 본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고, 이에 일본 전군은 철군 준비를 서둘렀다. 그 중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서 이순신의 봉쇄망에 갇혀 철군에 난항을 겪게 되었으므로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남해의 소 요시토시,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수백척 이상의 대선단을 꾸리며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노량해협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명의 진린과 연합 함대를 꾸린 이순신은 야간에 해협으로 진입한 일본의 선단을 향해 기습 포격을 가했고, 순식간에 수많은 일본의 전함들이 불타올랐다. 연이어 조명 연합 수군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일본군의 선단을 압도적으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승세가 완전히 조명 연합 수군에게 기운 순간, 눈먼 탄환이 이순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최고의 영웅은 자신과 조국의 마지막 전투와 그 승리를 끝까지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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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

A.D 1619

 

“너무나 순식간이라 구원할 틈이 없었다. 석양 아래 쏘는 화살이 비와 같고, 철마들이 오고가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절대적 강국 명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운 사이, 누르하치의 만주족은 급속도로 거대해졌고, 이윽고 명나라는 이들을 서둘러 제압하지 않는다면 큰 재앙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조선 조정도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며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명나라와의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대규모 원정군은 전력만 보자면 후금의 군세를 격파하고도 남았으나, 지휘관들의 무능한 지휘 탓에 분산되어 각각 호랑이 아가리 속을 향해 진격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노련한 누르하치는 승리의 냄새를 놓치지 않았고, 만주족의 기동력과 각개격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때 파견된 조선군은 7천 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항복하여 포로로 잡힌 이가 2천 7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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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李适—亂

A.D 1624

 

“관군이 적과 안현(鞍峴)에서 크게 싸웠는데, 적병이 크게 패하여 도망쳤다. 애당초 이괄이 정사(靖社)하던 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조정의 대우가 그의 뜻에 차지 못하였다. 이괄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국가를 경시하여 불궤(不軌)를 음모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잡히게 되자 자기 휘하를 협박하고 한명련(韓明璉)과 연합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평안도 병마사 이괄은 인조반정의 공신이었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정 신료들은 지속적으로 이괄에 대한 역모 고변을 제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괄은 조정으로부터의 압송을 요구받게 되고, 곧바로 금부도사를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괄 휘하의 반란군들은 북방 방어를 위해 기존부터 육성되어 오던 정예병이었고, 이들은 항왜 세력과도 결합되어 있었기에 반란 초부터 관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였다. 곧이어 이괄의 반군은 한양을 점령하기에 이르지만 정충신이 중심이 된 관군의 지휘부는 안령을 점거하며 반격을 개시했고, 이괄의 도성 점령은 불과 며칠 만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괄의 난 이후 조선의 북방 방어선은 약화되었으며, 이것은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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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산성 전투 龍骨山城戰鬪

A.D 1627

 

“정봉수는 의병을 소집하여 외로운 성을 고수하면서 먼저 장사준을 베어 사기를 치솟게 하였고, 대부대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는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싸워 적의 선봉을 무찔러서 보전시켰으니,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이런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정묘호란의 급박한 국면을 안정시킨 수성전.

누르하치 사후 그를 계승한 홍타이지는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인 조선을 쳐서 양면전선의 형성을 방지해야 한다고 여겨 아민으로 하여금 3만의 병력을 이끌게 하고, 사르후 전투 당시 항복한 강홍립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을 침공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후금의 말발굽에 의주, 안주, 정주, 평양, 황주 등 조선의 북방 거점들이 연이어 함락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기에 이르고, 소현세자 역시 전주로 내려가며 분조를 이끌었다. 전황의 열세가 호전될 기미가 없었기에 후금군이 얼마안가 한양으로 진입할 듯 보였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후금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 용골산성에서 의병장 정봉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후금군의 공세를 연달아 막아내고 끊임없는 유격전을 전개하며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용천에서도 이립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자 조선 내에서의 고립 위기를 직면한 후금군은 결국 조선과 상호 형제국의 예를 맺는 조약을 체결하며 본국으로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위기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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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전투 南漢山城戰鬪

A.D 1637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병자호란을 끝낸 조선의 비극적인 수성전.

홍타이지는 후금이라는 기존의 국호를 청으로 바꾸며 조선에게도 형제의 예가 아닌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다. 기존에 맺었던 형제국으로서의 관계도 꺼림칙했던 조선은 홍타이지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리가 만무하였고, 이에 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명을 공략하기 이전에 확실히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던 청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이와 같은 태도가 아주 좋은 구실이 되었고, 결국 청은 또다시 조선을 공격하였다. 청은 주요 방어 거점들을 우회하며 신속히 남하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먼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고, 인조의 본 조정은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홍타이지의 청나라 본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은 장장 40여 일간의 끈질긴 수성전을 전개하였으나, 장기전으로 인한 식량난과 병사들의 지속적인 사기 저하를 동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침내 왕자들이 피난 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항복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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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촌 전투 黃龍村戰鬪

A.D 1894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에 호남(湖南)에서 비적(匪賊)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출몰하면서 다시 전주부(全州府) 근처에 육박하였다고 합니다. 경군(京軍)을 출동시킨 지 벌써 수십 일이 지났건만 즉시 소멸하지 못하여 도적에게 느긋하고 대처하고 있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은 사상과 정치의 붕괴가 심화되고, 개화와 동시에 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는 무대로써 지독한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당시 그 여파를 받고 있던 조선의 민중들도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으로 시작된 동학교인들의 집회를 중심으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우며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은 이후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동학교인들이 ‘보국 안민’ 과 ‘제폭 구민’을 외치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나선 조선의 민중들은 장성 일대의 황룡촌에서 관군에 승리하는 성공을 거두며 전주성에 입성,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조선을 향한 외세의 개입이 본격화되었기에 결코 민중의 그 의지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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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牛禁峙戰鬪

A.D 1894

 

“지난 10월 23일에 후원 참령관(後援參領官) 구상조(具相祖)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公州)의 효포(孝浦)에서 파수하고 있었는데, 비적 전봉준(全琫準)이 옥천(沃川)의 비적들을 대교(大橋)에 모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가보니, 숲기슭에 모여서 기(旗)를 세우고 둘러선 자가 족히 수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동학의 1차 봉기는 선전하여 전주화약을 맺는데에 이르렀으나, 청과 일본의 국내 개입 시도로 동학 농민군은 조정과 합의하며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양을 점령하고 청과의 조약파기를 강요하며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반일을 기치로 내세운 2차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때는 그동안 관망 자세로 있었던 북접의 지도자들도 참가하여 수만 명 이상의 대규모 집결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 육군은 개틀링 기관포와 야포로 무장하며 화력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였으며, 동학 농민군은 결국 공주 우금치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은 관군에 의해 대거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결국 실패로 끝난 동학농민운동이었지만 거기에서 보여준 민중의 자주의식은 이후의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전주화약에서 비롯된 동학 농민군의 의견이 갑오개혁에 반영되며 하층계열로부터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반외세의 기치를 최초로 내건 무장투쟁으로써의 그 정신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의병 운동과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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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전투 崇禮門戰鬪

A.D 1907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통감부는 1907년 8월 1일 아침 7시에 서울 내 모든 대한제국군 지휘관들을 소집하였고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병부대신 이병무가 순종 황제의 조서를 낭독했다. 대한제국군을 해산한다는 것이었다. 박승환 참령은 이를 장병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군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방에서 권총으로 자결하였으며,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일선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3회에 걸쳐 돌격을 반복할 정도로 분투했지만 전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야포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들과 소총의 탄약들이 모두 일본군이 장악한 무기고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숭례문 누각을 선점한 일본군의 기관총 제압 사격과 견제로 인해 대한제국군은 병영 안에서 고립 되었고, 시가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싸웠던 이들 중 다수는 이어지는 정미의병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이후의 무장 독립투쟁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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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鳳梧洞戰鬪

A.D 1920

 

“싸움을 끝내고보니 독립군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 앉으며 「독립군들이 안개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어두워서야 호박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은 피파골에서 오는 자기쪽 지원군들과 오해로 말미암아 전투가 있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일본의 진공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1920년 6월, 홍범도를 필두로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에서 정규 일본군인 월강 추격대대와 교전하였다. 일본군의 추격대는 우수한 화기를 갖추었기에 홍범도는 이들과의 화력격차를 극복하고자 매복전을 구상하였고, 홍범도의 예측대로 일본군의 추격대가 매복장소로 다가오자 사방에 숨어있던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지형문제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제대로 반격조차 못한 채 퇴각했다. 당시의 전공이 과장되었다는 논란은 차차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이 전투에서의 성과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독립군 연합 지휘부의 일원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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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靑山里戰鬪

A.D 1920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씩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10월 21일을 시작으로 6일 동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연합 부대는 만주 허룽현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에 걸친 일련의 전투들을 벌였고, 마침내 10월 25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까지 이어진 일본군의 습격을 고동하 계곡에서 저지시키며 최종전투까지 완전히 끝마치게 된다. 이 전투는 독립군들의 전과와 그 규모에 대해서 의문점들이 많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시의 전투로 독립군을 섬멸하겠다는 일본 측의 작전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무장 독립투쟁도 다양한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혀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소련의 제안에 따라 적백내전에 참여했다가 자유시 참변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역량도 상실했다. 즉 이 전투는 한국 독립군 세력이 단일 체계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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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방어선 전투 漢江防禦線戰鬪

A.D 1950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사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분단과 함께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개전 초반부터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뺏기고, 부대간의 지휘체계마저 와해되며 전력 이탈이 가속화되던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이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한 김홍일 소장은 곧바로 전방으로부터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병력과 기존 경인지구의 관할 부대들을 재편성하며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력부대들이 흩어진 지 불과 10시간 만에 3개 사단으로 재편성된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도하를 시도하려는 인민군을 맞아 지연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애시당초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당초 3일간만을 목표로 적의 도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한 6월 28일부터 그들의 전차가 한강을 도하하여 경부국도로 진격한 7월 4일 아침까지의 일주일 동안 한강 방어선을 고수해냈다. 이로써 국군은 흩어진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에 필요한 시간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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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仁川上陸作戰

A.D 1950

 

“인천상륙작전은 5천 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이래 인민군은  겉보기에는 승리를 거듭하며 낙동강 안으로 국군을 포위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지속되는 전투, 미군과 유엔군의 합류 이후 증강된 화력이 정예부대의 전투력을 나날이 갉아먹는 상태였다. 그 시기 인민군의 주요 보급로는 경부선철도와 경부국도였는데 이 노선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하였고, 이들과 가까우며 해안가를 둔 지리적 요충지는 바로 인천이었다. 당시의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러한 점들에 착안하여 인천에 상륙작전을 펼쳐 인민군의 보급로를 끊고, 서울을 수복하고자 하였으며 마침내 9월 15일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인천의 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컸으며 넓은 갯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도 사실상 상륙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다양한 제약들이 존재하였지만 유엔군이 실시한 일대의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곧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과 서울을 연이어 수복하며 인민군에 대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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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長津湖戰鬪

A.D 1950

 

“산 중턱에 포진한 중국군을 다음날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날, 거기서 움직이는 중국군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얼어죽은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개성, 해주, 평양을 연이어 점령하고 마침내 압록강에 이르러 통일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한반도로 진입한 중공군은 동시 산발적이며 지속적인 유격전을 감행하여 맹렬한 기세로 국군과 유엔군에게 끊임없는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준 채 북위 37도선 이남의 평택-제천-삼척까지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당시의 가장 참혹했던 전투는 장진호 전투였는데, 중공군 9병단 예하 7개 사단에 고립된 유엔군이 그 포위망을 뚫어내며 양측 사이에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발생시킨 이 퇴각전은 단순한 군사적 교전뿐만이 아닌 전장에서의 기후도 그 영향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최저기온이 영하 45도에 달했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양측이 도합 만 명을 넘기는 수많은 동사자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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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 白馬高地戰鬪

A.D 1952

 

“사단이 적 공격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10월 6일 06:00부터 같은 날 19:00까지 백마고지 일대에 대한 적의 맹렬한 포사격이 실시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4 후퇴를 겪으며 북위 37도선 이남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개시하였고, 마침내 1951년 3월 서울을 재탈환하여 전세의 균형을 다시 맞추게 되었다. 이후부터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곧이어 1951년 7월부터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전투에서도 상대방의 진영으로 직접적인 충돌을 가하는 전면전에서 전선 주변의 전술적 요지를 두고 벌이는 고지전으로 그 양상이 변화되었다. 그 변화를 겪으며 벌어졌던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였다. 열흘동안 국군의 제 9사단과 중공군 제 38군 산하 3개의 사단이 교전하여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던 이 전투는 중공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고지의 북쪽 능선에서 최종적으로 후퇴, 마침내 국군의 완벽한 승리로 그 끝을 장식하게 되었다.

 

 

 

 

 

 

 

 

 

 

구문 출처 : 『삼국사기』, 「광개토대왕릉 비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학봉집』, 『이충무공전서』 「행록」, 『책중일록』, 『사기』, 『구당서』, 철기 이범석의 『우등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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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이후, 베르샤유 조약은 독일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은 절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강력히 주장했던 ‘독일에게 굴욕을 줄 정도로 가혹할 정도의 채무’에 반대했으나
프랑스-벨기에는 채무 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 서부 최대 공업지역 루르 지역을 침공하여 강제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루르 점령'(Ruhrbesetzung)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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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독일 루르, 프랑스 군의 행렬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이 프랑스 장교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다.

2년에 걸친 강제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군대는 130여 명의 독일인을 총살했다.
군대를 제한당한 독일은 변변찮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으며,
공업지대를 빼앗긴 독일은 경제적 재앙인 초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2년의 점령기간 동안 9억 달러의 차익을 남긴 프랑스 군은 25년 철수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 때,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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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라인란트 재무장’ 선포
대독일의 통일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체코 주데텐란트 지역 합병, 폴란드 침공

이를 본 영국-프랑스-벨기에 3국 연합군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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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벨기에 대 독일 동맹, 

나치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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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 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 막강한 공업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로마 제국 이후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인류 역사상 최강국인 대영제국과,
그 대영제국을 상대로 수백년을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중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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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 동맹의 선전포고에 대한 독일의 대답, 프랑스에 살포한 전단

“Nous vaincrons parce que nous sommes les plus forts”

 

“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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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선전포고, 역으로 프랑스 본토로 치고 들어가는 

독일군 141개 사단의 진격속도.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  독일군 프랑스 전역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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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에 포위된 영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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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5기갑군단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프랑스 최정예 제1기갑사단, 제4기갑사단 격파. 마스강 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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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
– 나치 독일 기관지 ‘검은 방패’의 당시 1면 헤드라인 –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의 서쪽 끝, 브리타뉴를 점령한 독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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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수도,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군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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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에 휘날리는 나치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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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입성 선봉부대의 사열을 받으며 항복 서명장에 도착한 히틀러. 

항복 서명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기차칸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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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귀국열차를 향한 환영인파 

 

독일 장병들이 탑승한 열차가 역을 지나갈 때, 모든 일반 열차는 운행을 멈추었다.

독일 장병들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독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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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독일 베를린, 라디오에서 격앙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장병들이 도착했다는
긴급 보도를 송출했다. 히틀러와 귀환한 군인들을 보기위해 생업을 멈추고 몰려드는 독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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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귀국한 히틀러 시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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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인해를 이룬 베를린, 지크 하일! (승리, 만세!)을 외치는 독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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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가의 정무(政務)를 나누어 맡아보던 여섯 관부(官府).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를 총칭한다.

그런데 이 많은 관청들은 왕이 거처하고 집무를 보는 곳인 궁궐에 있지 않고 궁궐과 가까운 곳에서 집무를 보았는데 그 곳이 바로 ‘육조거리’이다.

육조 거리의 위치는 지금 광화문 앞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이 있는 세종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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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조거리의 구성은 대략 이렇게 조성되어 있었다.

1395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이라는 도시를 만들며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큰 길을 낸것이 현재 광화문 광장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육조거리이다.

이 때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의 입구까지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39m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된 것이다.

몇년전 광화문 광장을 새로 조성할때 토층 검사를 해보니 조선 건국 이래 도로를 4번은 깐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됐다.

거리의 폭만해도 60미터가 넘음으로써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거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구한말의 사진이 남아 있어서 그 모습을 현재에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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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실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있어 이들의 합의로
국가 정책을 의결하였고, 그 아래에 육조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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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가 있었던 자리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오랜 기간동안 정부대변인 역할을 했던 공보처, 문화부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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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하는 관청으로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 시설의 설치.운영을 총괄하는 곳으로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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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인구 및 재정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호구의 관리, 각종조세의 수취, 식량과 재화의 관리 등 국가의 재정과 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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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와 호조가 자리잡고 있는 자리에는 국가통신망의 중추를 담당하는 KT 본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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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소,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문관으로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내고 70세가 넘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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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관청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교보빌딩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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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등의 관아가 있었던 육조거리 동쪽편 관청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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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재개발하면서 육조거리 동쪽편을 흐르던 작은 개천인 열천을 복원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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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의례.교육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문화부’, ‘교육부’, ‘외교부’에 해당한다. 국가적인 의례와 음악, 제사의 시행, 학교와 과거의 운영, 외교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예조는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행사연습을 위한 공간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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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종합청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원래 예조가 있었으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예조가 있었던 자리에 무반을 상징하면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오늘날 합참본부에 해당하는 삼군부 청사를 세웠다.

이때 예조는 한성부가 있던 자리로 옮기고 한성부는 경희궁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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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정부종합청사. 이곳에는 옛 관아건물로 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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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부, 문무 당상관이면서 소임이 없는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대우하는 관청이다.

본래 이 관청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최고의 군사기구였으나 뒤에는 고위 관료들을 예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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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언론 및 감찰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감사원’과 유사한 관청이다.

국왕에 대해 간언하고, 관원들을 감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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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와 중추부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도심공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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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무관의 인사를 비록하여 국방과 군사의 제반 사항, 봉수, 역참 등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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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법률.사법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법무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범죄의 조사 및 처벌, 소송, 노비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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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 국토의 관리나 공사, 공예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난 ‘국토해양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산림의 관리, 치수, 건축, 토목, 그리고 수공예 등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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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해방이후에도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70년대 문화공간인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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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 남쪽편 관청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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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 남쪽편 작은 관청 건물들은 대부분 개인소유의 상업건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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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 서쪽편 세종문화회관 주변. 관아 뒷편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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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개울이 흐르던 곳으로 지금도 골목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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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에 육조 거리(지금의 광화문 광장을 포함한 세종로)에 있는 해태상앞에서 말을 탈 사람을 기다리는 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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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광화문과 육조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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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도 육조 거리

사진만 봐도 도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표현이 거리로 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광장이란 말로 대신해도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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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바라본 육조거리

조선 최고의 관청이 모인 거리이지만 관원, 일반 백성, 아이들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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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에는 해태상 두 개가 있는데 그 해태상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휴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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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은 일제침략기 때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가 생기면서 모두 철거되었고
그 일대도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을 겪으며 모두 사라져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철거되기 직전 1920년쯤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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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찍은 육조거리 인근 모습.

왼쪽 가운데쯤에 광화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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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의 육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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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보여주는 미니어쳐.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이었지만, 조선 왕들은 경복궁에 있는 걸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추억으로살지

 

 ……사방의 제이制夷는 모두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단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가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만약 그들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고 우리 변경을 소란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좋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중국의 걱정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한다면, 역시 좋지 못할 것이다.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단지 한때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상살할까 그것이 두려우니,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다만, 호융(胡戎 : 몽골)과 중국은 국경이 붙어있어 오랫동안 전쟁을 펼쳐왔으니, 반드시 좋은 장수를 가려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 그들에게 대비하여야만 한다.

 

 

 이제 나는 정벌하지 말아야 할 여러 나라의 이름을 열거하겠다.

 

 

 동북에서는 조선국.

 

 

 정동편북에서는 일본국.

 

 

 정남편북에서는 대유구국(오키나와), 소유구국(지금의 타이완).

 

 

 서남에서는 안남국. 진랍국(캄보디아). 섬라국(타이), 점성국(참파), 소문달랍국(수마트라), 서양국(인도 남부), 일형국(말레이시아), 백화국(자바섬), 삼불제국(팔렘방), 발니국(브루나이). 

 

 

─ 황명조훈 中

 

 

 

 

“옛날의 황당한 군주로서 수나라 양제(煬帝)와 같은 임금은 국토를 확장하려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내가 마음속으로 가장 싫어하는 바이다.”

 

 

─ 고려사 세가 공민왕 21년 9월. 고려에 보내는 주원장의 서신 中

 

 

 

 

“짐이 조선과의 분쟁을 그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라!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란 백성들에게 있어 재앙이 되지 않겠는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로 그들(조선)을 질책하도록 하고, 그래도 그들이 뉘우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때가 되서야 토벌을 이야기해도 실로 늦지 않을 것이다.”

 

 

─ 명태조실록 권 257, “조선을 공격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을 묵살하며”

 

 

 

 

“짐이 고려를 보건대, 탄환 한 알처럼 벽처의 구석에 있고, 그 풍속이 중국과 현저히 달라, 사람을 얻는다 해도 인구를 늘리기엔 부족하고, 땅을 얻는다 해도 강토(疆土)를 넓히기엔 모자를 뿐이다.”

 

 

─ 명태조실록 권 228

 

 

 

 

 

 아마 주원장이 빈민 출신으로서 황제가 되었다는 점도 영향이 클 것 같은데, 주원장은 ‘위세를 과시하는 차원’ 에서의 대외 정복 전쟁 등은 패가 망신하는 지름길, 그리고 그런 ‘정복용’ ‘위세 과시 용’ 으로 전쟁 일으키는 전대의 황제들은 또라이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스무 살 가까이 어렵사리 농사를 지으며 살던 주원장에게 있어 ‘외국’ 이란 존재는 그저 한없이 불온하고 이해 불가능하며 가능하면 서로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마인드가 상당했고, 자기 있는 살림이나 잘 관리해야지 그런거에 관심 가져서 설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짓… 외국의 기이하고 풍부한 물산에 관심을 가지거나,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복하고 대외에 위엄을 과시하자는 식의 생각은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습니다. 

 

 

 황명조훈에서 가장 강조한 적수인 몽골에 대한 부분도, 어디까지나 중원을 지키는 방어적인 입장에서의 유훈.

 

 

 홍무 연간의 눈에 띄는 대외 원정이라고 하면 대 북원전 정도를 빼면 대리, 임안 정벌 정도 뿐입니다. 게중에 임안은 대리를 점령하는 와중에 겸사겸사 수준.

 

 

 그러면 고려와의 철령위 분쟁 등은 무엇인가 할 수도 있는데, 본래 주원장은 고려 외에 일본에 대해서도 실제 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면서도 틈만 나면 “내가 친히 군사를 몰고 가서 너희들을 치겠다. 알아서 잘 해라.” 라는 식의 협박을 반복했습니다. 진짜로 전쟁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유난스러울 정도로 블러핑을 적극적으로 일삼았다는 것.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의 국왕 이성계에게 대놓고 “내가 보기에 넌 왕을 할 자격이 없다. 자꾸 까불면 치겠다.” 고 서신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도, (하도 갈궈대니 열 받은 이성계가 “황제란 작자 하는 짓이 어린아이에게 공갈이나 치는 수작 아닌가?” 하고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 실제로 “조선을 치자” 는 여론이 나오자 이를 대번에 묵살해버습니다.

 

 

 주원장의 인식에서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인식은, 중국은 이미 충분히 큰 나라이자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농업국이고, 노동력도 충분한데다 당시의 수준으로 상공업 및 해외 시장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경제적 차원’ 에서 타국을 치는 건 ‘무의미한 짓’ 이었습니다.

 

 

 주원장의 생각에 대외 원정이란 일단 군사를 일으키면 승패를 떠나 엄청난 자본이 소모되고 백성이 고난에 빠지고, ‘설사 이긴다고 쳐도 본질적으론 무의미한 짓’ 이었습니다. 이미 중국에 땅이 충분하고 사람 또한 넘치도록 있는데, 풍속이 전혀 다른 나라를 점령해봐야 쓸모 있는 영토를 얻을 수도, 의미 있는 노동력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세계정복’ ‘정복왕’ 같은, 군주에게 있어 야욕인 동시에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욕구는 주원장에겐 전무했습니다. 오히려 주원장의 입장에선 그런 인간들은 “또라이” 면서, “마음속으로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대외 원정을 하는건 물론이고, 그 외에 따로 타국의 무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화려한 외국의 기이가 펼쳐지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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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주원장이 봤으면 졸도했을 광경들…

 

 

 

 

 주원장이 신신당부라고 남긴 황명조훈은 다름 아닌 “아들” 인 영락제가 곧바로 위반하는 웃픈 상황에 직면하고 맙니다. 영락제는 “대외 원정을 자제하라. 아니, 하지 마라.” 라는 주원장의 유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50만 대군을 다섯 차례 동원하여 북방 원정에 나섰고(이른바 오출삼려五出三犁), 그 유명한 ‘정화의 대함대’ 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합니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영락제 시기에 이르러 주원장 말기에 비교해 60개국 이상 늘어났는데, 전근대 중국의 외교 관계는 조공 책봉 관계 밖에 없으니 즉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나라가 영락제 시기에 이르러 대폭 증가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서로는 티무르 제국과 다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일본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관계를 맺었으며, 브루나이와 말라카, 술루 등 머나먼 곳에 있는 나라의 국왕들은 자신들의 일족과 수하 수백명을 이끌고 쉴새없이 자금성에서 영락제를 알현했습니다. 

 

 

 외국과 중국의 대외관에 있어 영락제의 마인드를 말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제왕이란 세계의 중심이며, 만국을 배려하고 통어(統御) 하는 존재로다. 진실로 드넒은 하늘이 덮지 않는 곳이 없고, 땅이 싣지 않는 것이 없듯이, 멀리서 온 자가 있으면 모두 인자함으로써 다스리고 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줘야 하느니라!”

 

 

 ─ ‘명태종실록’ 영락 원년 10월 신해일 기사

 

 

 

” 성조(영락제)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자신의 위광으로 만국을 통제하기를 바랐기에 사방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재촉했다. 이에 서역의 대소 국가들은 신종하지 않을 수 없어 앞을 다투어 조공을 했다. 그래서 북으로는 사막에 닿고 남으로는 대해에 이르렀으며, 동서로는 태양이 뜨고 지는 지점까지 이르렀으매, 대략 배와 마차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성조의 위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명사 서역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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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이 미쳤나….”

 

 

 

 주원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국을 통어한다느니, 해가 떠오르는 곳과 지는 곳까지 제국의 위광이 미쳤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전부 쓰잘데기 없는 수작 으로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 이었습니다. 사실 진짜 경제적으로는 저렇게 외국과 관계를 맺거나 적극적인 전쟁을 펼친 영락제 시기의 일들은 거의 의미가 없긴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따져보자면 좀 복잡해질 순 있겠지만….

 

 

 

 때문에 영락제의 진정한 룰모델은, 아버지인 주원장보다 오히려 ‘쿠빌라이 칸’ 에 가깝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물론 영락제 사후 다시 명나라의 대외 정책 기조는 수세적으로 바뀌게 되긴 합니다만, 영락제가 남긴 유산 중에 수도를 ‘경제적 목적의 수도 남경’에서 ‘대외적 목적의 수도 북경’ 으로 이전한 유산은 결정적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은 코 앞에 통일제국의 수도가 있는 압력을 아주 강하게 받게 되었고…

 

출처: Europa Universalis 원문보기 글쓴이: 하이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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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한 중국인 집 안에는 상기된 얼굴의 조선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13명. 윤세주, 이성우 등이 좌정한 가운데 날카로운 눈매에 잘생긴 얼굴의 한 청년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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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사투리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언어는 정연하면서 매서웠다. 

23세의 청년. 그러나 어느 범보다도 무섭고 어떤 용보다도 날래게 ·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 사람이었다. 

그 이름은 김원봉. 그의 주도 하에 ‘의열단’이 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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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채택했다

 

 

 

 5개의 파괴대상으로는 우선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 등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원한이 하늘을 갈랐던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그리고 식민통치의 촉수인 각 경찰서와 주요 기관을 들었다. 

 

 

 

그리고 죽여야 하고, 또 죽여도 되는 ‘7가살’의 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일본 고관 ,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 등을 명시했다.

 

 

 

이 의열단의 정신을 신채호가 그 사나운 명문으로 표현한 것이 유명한 “조선 혁명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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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후 1920년대 초반 의열단의 이름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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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

 

1920년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공격하여 서장을 폭사시킨 것을 필두로 

의열단원들은 일본 경찰의 공포의 대상이자 최고의 목표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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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터뜨린 나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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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를 들부수고 1대 20의 총싸움에서 그 대부분을 쏘아 넘어뜨린 명사수로서, 

이후 주택가 지붕 위를 오르내리면서 무려 1000명의 경찰들과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 한 발로 자살한 영화 주인공같은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의열단원이었고, 

심지어 황옥 경부같은 조선인 경찰 고위 간부까지도 의열단에 포섭되어 폭탄을 반입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가히 의열단의 이름은 신화적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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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사건 기사. 사진은 21세 때의 김원봉.

 

 

 

의열단에 소속된 젊은이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보내던 젊은이들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고 최고의 멋을 내면서 수영과 테니스를 즐기며 여생(?)을 만끽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젊은 청년들은 당시 조선 여성들의 모성 본능과 동시에 동경을 자극했다.

그들의 정의로운 면모는 비탄에 빠진 조선 쳥년들에게 희망이 되어줬으며

한마디로 ‘백마탄 기사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비장하기까지한 로맨스가 존재하였으며 청년들의 짧은 젊음을 빛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역시 의열단의 ‘수괴’ 김원봉이었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김원봉을 이렇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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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김원봉 장군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미년 이후 친일파와 일본 관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겁의 대상이었고,

 나와 같은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는 조국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

 

 

  김원봉은 뛰어난 리더쉽과 용맹함.그리고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해 실제로도 여성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고

청년들에겐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제는 김원봉을 잡기위해 야단법석을 부렸지만 김원봉은 여유로웠다. 

그 당시 김원봉의 현상금은 무려 100만원이였다 (현재 시가로 320억)

독립운동가에게 걸린 현상금으로는 역대 최고액이였고 그 다음은 김구선생이였다.(60만원)

 

 

김원봉에 대한 일제 정보기관의 기록
“보기에는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오안부적(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하여 신출귀몰한 특기를 가졌다.”

아리랑 김산의 기억
“김약산은 확실히 구별되는 두 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점잖고 친절했지만, 적에게는 지독히 잔인했다.”

 

 

 

 

그러던 김원봉에게 반려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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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박차정 선생이다.(1910.5.8~1944.5.27)

  

 

 

박차정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한 아버지와 신간회,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 등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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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앞줄 중앙이 박차정 선생

 

그녀는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체포,구금당했다. 

이곳에서 남녀평등사상과 독립의지를 키워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살의 어린나이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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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덕술

 

그러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무거운돌로 머리를 짓이기고 

손톱을 뽑히는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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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문휴유증으로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게되어

1930년 봄에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고있던 둘째오빠 박문호로부터 

중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그 길로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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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박문호 (박차정의 둘째오빠)


 

박차정 선생의 국내에서의 활약은 그녀의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전해져 이미 중국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화제였었다. 

그때 의열단장이였던 김원봉은 그녀의 공적을 인정하여 의열단 간부에 선임하였다. 

그후 박차정은 국내에서 못다 이룬 독립 투쟁을 오빠와 동지들과 중국에서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20살이라는 어린나이에 믿기힘든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그녀를 마음에 둔 김원봉은 

 1년뒤인 1931년,그녀와 결혼하였고 박차정 선생은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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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난징으로 거주지를 옮겨 남편인 김원봉이 난징에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당시 그녀는 ‘임철애,임철신’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과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고 ‘조선민족 전선연맹’과 

이것의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 의용대’에서 부녀복무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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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중 1939년 2월 장시 성 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총을 맞아

 그 휴유증으로 194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충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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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2월 환국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임시정부 요인들.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김원봉이다.

 

 

 

 광복이 되자 김원봉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 밀월에 돌아왔을 때는 그 앞에 레드 카펫이 깔릴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의 환영인사를 받은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귀국할때 가져온 

박차정의 유골과 서거할 때 피뭍은 적삼을 직접 묻고 장례식을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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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여사 장례식 中 가운데가 김원봉 장군

 

그리고 그는 좌익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이 아닌 한국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그를 체포한 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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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은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김원봉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개 끌 듯 끌고 갔다.

1919년에 의열단을 결성한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일제 경찰에 잡히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노덕술에게 조사과정에서 뺨을 맞고 빨갱이새끼라는 모욕을 당했다.

수십 년 동안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투쟁을 했던 중년의 전사(戰士)의 속내가 어떠했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북반부로?”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의열단 동지 유석헌에 따르면 김원봉은 이후 사흘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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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김원봉이 북한으로 넘어간것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해방전보다 더 설치며 활동하는것에 남쪽에 대한 희망을 저버렸다고 한다.

 

유석현의 회고에서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후로 술만 마시며
“여기서 있다간 왜놈들 등살에 언제죽을지 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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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3번째가 김원봉

 

그는 북한에 남아 북한 정부의 수립에 참여해 초대 국가검열상에 오르고, 

북한 정부의 구성자체가 항일을 주장하였기에 김원봉은 친일파 제거에 업적을 세운다.

김원봉은 월북 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가졌지만, 언제나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주장했다. 

그때문에 김원봉은 김일성 눈밖에 나게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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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김원봉이 거물급으로 커버리는것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은 독재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김원봉을 숙청하기로 결정,

 

 그 죄명도 어처구니없게도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게된다. 

 

결국 김원봉은 분을 못이겨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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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역사속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모략 속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있기 때문이다.

 

무장 독립운동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활동을 남긴 그였지만,

 이념 하나 때문에 그는 60년 넘게 차가운 역사속에 묻혀있다.

학부대신(오늘날 교육부 장관)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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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때 그가 벌어드린 돈은 현재 가치로 400억에서 450억원 정도 된다.

 

그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소유했던 땅은 여의도 면적에 7.7배에 달한다.

 

1920년에 후작으로 승급한 이완용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당시 한국인 남자의 평균 수명은 32.4세에 불과했다.

 

그가 죽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는 친미파가 득세할 듯하니 넌 앞으로 친미파가 되어라”

 

 

군부대신(오늘날 국방부 장관) 이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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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집으로 돌아간 이근택은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라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근택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는 항상 일본 신발을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녔다.

 

용인 민속촌에 있는 99칸짜리 집이 이근택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왕을 제외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집이 99칸이었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이창훈은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해 대를 이은 친일을 도모했다.

 

 

내부대신(오늘날 행정안전부 장관)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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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1911년에 은사공채 10만엔을 받았다. 10만엔은 지금의 가치는 약 20억원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귀족에게 은사 공채를 지급했는데, 은사공채증권을 받게 되면 원금을 5년 거치한 후 50년 이내로 상환 받을 수 있다.

 

이 공채는 연 5%의 이자가 붙었고, 매년 3월과 9월에 지불됐다. 이지용의 경우 6개월에 한 번씩 5천만원을 이자로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지용은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고 받은 돈을 도박하는데 탕진했다.

 

그는 한때 도박죄에 걸려 귀족 예우가 정지되기도 했지만, 더 열정적인 친일로 다시 귀족 작위를 받고 5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수당을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외부대신(오늘날 외교부 장관) 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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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은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성균관의 후신이었던 경학원 대제학으로 임명돼 친일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후 일본의 총독 정치 옹호 선전을 하며 일본을 유람하다가 1916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박제순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당시로서는 드문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호의호식했다.

 

그의 손자 박승유는 할아버지의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결국 매국노의 자손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일파 할아버지는 편히 삶을 마감했지만, 독립운동한 손자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농상공부대신(오늘날 농림수산식품부, 산업통상지원부 장관) 권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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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권중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충무공 권율의 9대손 아버지와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는 1908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욱일대수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수여하는 욱일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겁을 먹고 귀족 작위 반납을 신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1운동이 잠잠해진 후에는 다시 친일활동에 가담했다. 노년의 그는 매년 수당으로 3천원(현재 가치로 약 6억원 정도)을 받으며 살다가 1934년 81세로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1946년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선언’

1946년 1월1일 아침. 일본 히로히토 일왕(昭和天皇)은 라디오 방송으로 신년 담화를 발표한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신(神)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일왕은 스스로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혔고, 국민들에게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한다.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패전국 일본에 대한 원활한 통치를 위해 히로히토와 정치적 거래를 한다. 아시아 각국의 바람과는 달리 일왕을 전범으로 법정에 세우지 않으며 ‘천황제’ 역시 폐지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 대신 신격화된 초법적 권위로 절대복종의 명령을 내리던 일왕이 직접 육성으로 일본인들에게 ‘인간’임을 선언하도록 했다.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콤플렉스’가 통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 ‘천황’에 대한 단죄 대신 정치적 이용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일왕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11세기 무사들이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700여년간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다. 권력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은 1600년 이후로는 항상 존폐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다.

일왕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된 것도 정치적인 이유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도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일왕을 이용한다. 일왕을 민족 통일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유신정권의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왕을 헌법 위에 올려놓으며 ‘천황의 뜻’이라면 불가능이 없는 일본 제국주의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무모한 전쟁은 무조건 항복으로 마무리됐고, 이듬해 ‘천황’은 ‘인간’이 됐다. 물론 아직도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여전히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지만 이는 ‘인간선언’으로 일왕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타의에 의한 정치적 ‘인간선언’이었지만 ‘천황’의 인간화는 전후 일본의 정치·경제적 선진화에 큰 도움이 됐다.

 

새해 우리나라에서도 비인간적인 ‘정치’를 쏟아내던 이들의 반성과 성찰, 그리고 진심어린 ‘인간선언’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